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종교적 소수자 (문단 편집) === 남아시아 및 중앙아시아 === * [[시크교]] 인도, 파키스탄 뿐 아니라 캐나다와 영국에서도 인지도 높은 종교적 소수자 집단이다. * 북인도 내에서의 "'''비힌두 종교 대다수'''" [[힌두교|힌두]]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한 배타적 [[사회보수주의]]가 뿌리깊은 와중에 보수우파 정당인 [[인도 인민당]]이 이것을 더 부추기고 있다. 그렇기에 기독교인이건 무슬림이건 시크교도이건 불교도이건 비힌두인들은 기본적으로 차별의 대상이다. 특히 북인도의 힌두교도들을 자주 침략하거나 정복했던 무슬림들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강하다. 반면 남인도의 경우 무슬림이 침략자라기보다는 교역 파트너였으며, 남인도가 비교적 세속주의 성향이 강하다 보니 비힌두 종교에 대한 차별이 훨씬 덜하다. * [[파르시]] 인도 구자라트 지방을 중심으로 해상 무역에 종사하던 페르시아 조로아스터교 신자들의 직계 후손. 이쪽은 이란의 조로아스터교도처럼 차별받는 건 아니지만,[* 이들은 인도에서 가장 부유한 사회 집단 중 하나이다.] “부모 양쪽 모두 파르시인 경우에만 파르시로 인정받는” 율법 때문에 사멸 위기에 놓여있다. 영국이 인도를 식민 지배를 시작할 때 영어를 제일 빨리 배운 민족으로, 대영 제국 시절에 많은 특혜를 누렸으나, 기독교로 개종하거나 서구인과 통혼하는 경우가 급증해 민족종교 공동체는 사멸 위기에 처했다. 중국의 파르시들도 해상 무역으로 번영을 누렸으나[* 당나라 때는 “의사가 병에 걸리고 페르시아인이 궁핍하다.”라는 속담마저 있었다 한다.] 한족, [[후이족]]과 동화되며 명나라 때 사멸했다. * 무슬림 [[카슈미르인]] * [[자이나교]] 종교 계율이 너무 엄격해서 한 국가의 지배 이념이 되기 힘들고[* 자이나교 교리는 살생을 철저히 금지하는데, 이 때문에 자이나교 신자는 해충을 죽여야 하는 농업이나 가축의 수를 조절해야 하는 축산업 종사가 불가능하다.] 종교적 소수자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 [[파키스탄]]의 기독교, 힌두교, [[아흐마디야]] 및 토속 신앙을 믿는 [[칼라쉬인]] [[아흐마디야]] 신자들의 경우 영국 내 파키스탄 커뮤니티 내에서도 종교적 소수자이다. * [[이스마일파]] [[어새신]]으로 유명한 [[시아파]] 극단주의 교파. 물론 이 교파 신도들이 다 어새신처럼 암살만 하고 사는 건 아니고 [[이븐 시나]]처럼 역사적으로 유명한 학자가 된 경우도 있다. 이븐 시나의 경우 학자로서의 명성도 유명하고 정권의 후원도 받았음에도 종교적 소수자였기 때문에 여러차례 살해 위협을 받는 등 삶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오늘날에는 과거와 같은 극단주의 교리를 버리고 아가 칸 4세[* 영국인과 페르시아인의 혼혈이다.]를 중심으로 이슬람의 현대화, 양성평등 등의 개혁 운동을 펼치고 있다. 오늘날 이스마일파 그중에서도 니자리파의 상당수는 소련의 지배를 받은 영향으로 이미 상당히 세속화되어 아가 칸 4세의 개혁 운동을 적극 환영하고 있으나, 니자리파 신도들이 대개 그렇게 돈이 많지 못한 관계로 이슬람권 주류에 특별한 영향력이나 위협을 가하지는 못하고 있다. * [[아프가니스탄]]의 쉬아파 [[하자라인]] *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및 예멘 일대의 보흐라파 예멘에서 인도 [[구자라트]]에 정착한 시아파 신도들의 후손으로, 남아시아 및 중앙아시아에서 극히 드문 [[여성할례]] 악습을 시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거의 유일하다고 보면 된다. 심지어 [[탈레반]]조차 여성할례는 야만적 악습이라며 거부할 정도였다...] * [[스리랑카]]의 [[힌두교]] 스리랑카의 주요 민족인 싱할리인은 남인도의 [[타밀]]계 힌두 왕조들이 계속 남하해오는 바람에 2천년 넘게 전쟁을 벌여야 했는데, 타밀족이 [[싱할라인]]에 비해 인구가 월등히 많았기 때문에 과거에는 싱할라족이 일방적으로 밀리는 형편이었다. 이 와중에 스리랑카 북부의 승단이 파괴되고 싱할라인에 대한 힌두교 개종도 강요되었다. 한술 더 떠서 영국 식민 지배 시절 동안 백만 명 이상의 타밀족의 스리랑카로 새로 유입되면서 싱할라인들과 타밀인들과의 갈등과 상호 불신이 악화되었다. 영국에 의한 타밀족 대량 이주는 타밀족 사회 내 내부분열도 일으켰는데, 고대와 중세 시대 스리랑카에 정착한 타밀족들은 대부분 [[브라흐민]]이나 [[크샤트리아]] 같은 상위 카스트로 족보 조작이 완료[* 북인도의 카스트 제도는 [[인도아리아인]]과 [[드라비다인]], [[문다인]]의 계급을 구분하기 위한 인종차별적 성격이 강했다면, 드라비다인 일색인 남인도에서는 카스트 제도가 중국이나 한국의 신분제도처럼 다소 느슨하게 되어 있었고, 재산을 축적한 하위 카스트들이 족보를 구입하고 위조하는 행각도 사실상 용인되었다. [[불가촉천민]], [[유색인종]] 문서 참조]되었던 반면, 영국 식민지배 시절 스리랑카에 이민 온 타밀족들은 대부분 수드라나 불가촉천민이었기 때문이다.[* 스리랑카 내전 당시 타밀족들이 인도 타밀나두 지방과 말레이시아, 싱가포르의 타밀족 동포들로부터 그렇게 많은 지원을 받았음에도 패배한 이유 중 하나로 타밀족 내 상위 카스트와 하위 카스트간의 상호 불신이 지적된다.] 현대에는 '''[[스리랑카 내전|LTTE]]'''의 자폭 테러로 불교 사적들이 파괴되면서 힌두 소수자에 대한 종교적 반감이 더 심해졌다.[* 참고로 자살 폭탄 테러는 스리랑카의 LTTE가 원조로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에서 저렴한 비용의 효과적인 테러 방법이라며 이를 벤치마킹(...)하면서 전 세계로 전염된 것.]. 자세한 내용은 [[스리랑카 내전]] 문서 참조. * 스리랑카의 기독교, 이슬람교 또한 스리랑카의 불교는 포르투갈과 영국의 식민 지배 당시 기독교계로부터 극심한 탄압을 받았던 역사가 있었는데, 그 반작용으로 오늘날의 스리랑카의 기독교의 입지는 매우 취약한 편이다. 이미 영국 식민지배 시절에도 기독교 선교사들과 불교 승려들 사이에서 벌어진 파나두라 대논쟁[* Panadura Debate. 1873.8.23~28일에 스리랑카 남부의 도시 파나두라에서 있었던 불교와 기독교의 논쟁.]에서 기독교 선교사측이 공개적으로 패배하면서[* 다만 파나두라 대논쟁 이전에 기독교 선교사들이 불교에 대해 자행한 차별이나 편향도 만만치 않았기에 마냥 피해자는 아니다.] 기독교의 입지가 크게 위협받았다. 유럽인과 스리랑카인 혼혈인 버거(Burgher)인들도 스리랑카 전통 상좌부 불교로 개종하는 일이 늘고 있다. [[스리랑카 테러]] 이후에는 무슬림 소수자에 대한 증오와 편견이 증가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스리랑카 테러 이후 그동안 스리랑카에서 천덕꾸러기 대우를 받던 기독교인의 이미지가 크게 개선되고 있다고 한다.] 스리랑카의 이슬람교는 원래 서부 해안지방에서 다수였으나, 16세기 포르투갈인들의 침략과 강제 개종 정책으로 쓸려나갔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